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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곡] 김시습의 생애

admin 2016.03.03 02:21 조회 수 : 91


All parts by 권지훈
보컬 : 오병서
랩 : 신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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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랩]
태어난지 여덟 달 벌써 글을 깨우쳐가 시습의 이름을 받은 강릉 오래된 가문을 빛낼 날
을 기다리던 기린아 왕의 부름을 받은 총아 고향에 돌아가 수양을 닦다가 바람의 길을 떠난 풍운아 
그건 1453년 예상치도 못한 기연 스스로 똥통에 빠져 통분에 울분에 눈물을 흐느끼던    
그의 뒷모습은 마치 회오리 물과 같이 가치를 잃어버린 세상을 떠나갔지
맑다 못해 차가운 심지를 창자에 드리운 청은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시름은
몰아치는 바람처럼 퍼붓는 빗줄기처럼 홀로 구석에 서 있는 소나무 줄기처럼
시를 쓰고 통곡하고 조각하고 통곡하고 고개에 올라 통곡하고 갈림길에 통곡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그가 속한 곳은 없고 가슴의 열정을 풀지 못한 그가 머물 곳은 없고

[노래]
사람으로 나 태어나 왜 이렇게 할 일을 못했다고 
내 철없던 젊은 날의 많은 꿈을 잃어버렸네 
나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워 숨고 싶어 이런 맘 왜 진작에 깨닫지 못하였나

[랩]
수심이 갉아먹은 폭병에 마치 복병 같은 저자거리의 시선은 마치 성난 환영 
매월당을 향해 삿대질 경망스런 욕질 그렇지만 멈추지 않은 췌세옹의 광대질
불우한 시대 바람 같은 나그네 금오산실에서 그가 붓을 드네 
풍류기화 자신과 세상을 형상화 이것이 오늘 날의 금오신화

[나레이션]
꿈꾸다 죽은 늙은이가 되고픈 당신에게 바칩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랩]
1493년 2월에 온 산골이 슬퍼해 절간에서 哀哀哀 그는 떠나버렸네
이른 봄날에 온 강물이 슬퍼해 절간에서 哀哀哀 그는 떠나버렸네
쉬흔 아홉에 온 산골이 슬퍼해 절간에서 哀哀哀 그는 떠나버렸네
이른 봄날에 온 산골이 슬퍼해 절간에서 哀哀哀 그는 떠나버렸네

[노래]
사람으로(사람으로) 나 태어나(나 태어나) 왜 이렇게(왜 이렇게) 할 일을 못했다고 
내 철없던(내 철없던) 젊은 날의(젊은 날의) 많은 꿈을 잃어버렸네 
나 고요히(나 고요히) 생각하면(생각하면) 부끄러워 숨고싶어 
이런 맘 왜 진작에 깨닫지 못하였나 

[랩]
시를 쓰고 통곡하고 조각하고 통곡하고 고개에 올라 통곡하고 갈림길에 통곡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그가 속한 곳은 없고 가슴의 열정을 풀지 못한 그가 머물 곳은 없고
시를 쓰고 통곡하고 조각하고 통곡하고 고개에 올라 통곡하고 갈림길에 통곡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그가 속한 곳은 없고 가슴의 열정을 풀지 못한 그가 머물 곳은 없고

[나레이션]
사람으로 나 태어나 왜 이렇게 할 일을 못했다고 내 철없던 젊은 날의 많은 꿈을 잃어버렸네 나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워 숨고 싶어 이런 맘 왜 진작에 깨닫지 못하였나

☞ 김시습은 세종 재위 17년(1435년) 한성에서 태어났다. 이웃에 살던 최치운이 논어에 나     오는 말을 따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의 시습(時習)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시습은 여     덟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 살 때에는 이미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소학 등도 읽어 그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섯 살 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던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     적으로 공부에 전념하면서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허조라는 정     승이 호기심에 김시습을 만나 시를 짓게 하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시를 지었다는 일     화는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예일 것이다. 이런 소문은 대궐까지 전해져 세종은 비단      50필을 상으로 줬다고 한다.
   이계전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힌 김시습은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김반과     별동 윤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겨우 십여 세에 익히지 못한 책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시습이 열다섯 살 때, 어머니 장씨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고, 3     년이 못 되어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병세하고 말아 본가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어 오히려 그에게 짐만 되었고,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김시습은 가정에 흥미를 잃고 삼각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삼각산 중흥사에 머무르며 수양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흘 동안 망연자실하여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머리카락마저 잘라 버리고 산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     작했는데 그의 나이 스물한살이었다.
   3년여에 걸쳐 관서지방의 곳곳을 돌아본 김시습은 세조 재위4년(1458년)에 탕유관서록    을 쓰고 나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물여섯살에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치고 나     서 탕유관동록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삼남지방으로 떠났다. 삼남지방의 유랑은 스물아     홉살이 되던 해 끝났는데 탕유호남록을 지었다. 
   이후 세조 재위9년(1463년) 책을 구하기 위해 한성으로 돌아왔다가 자신을 아껴주었던     효령대군을 만나게 된다.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세조의 불경번역 작업에 참가했지만 이내     세상사에 실망하고 금오산으로 들어가 칩거한다. 세조 재위 11년(1465년) 3월에 원각사     낙성식에 참가해 달라고 효령대군이 요청하자 한성에 와서 찬시까지 지어 주지만, 바로     금오산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 시기 즉, 1465년 그의 나이 서른한살 때부터 1479년 그의 나이 서른여섯살 사이에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김시습은 서른일곱살이 되던 성종 재위 4년에 또 다시 효령대군의 청에 의해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20여년 가까이 세상과 겉돌았던 그로서는 번잡한 한성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성동에 집을 짓고 이름 없는 민초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한다. 
   이 시기에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의정 정창손과 달성군 서거정 등이 김시습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그들은 김시습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터라 천재의 한으로 이해하고 노여워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를 상대해봤자 오히려 자신들의 체신만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마치 불자처럼 살아가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인 성     종 재위 12년(1481년)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세상으로의 환속     이었다. 그의 환속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초조감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그는 그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는 안씨 부인을 맞아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정생활도 얼마 후 안씨가 세상을 떠나 버려 끝나고 만다. 그런 와중에 성종     재위 13년(1482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을 보자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선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들었다. 그곳에     서 김시습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성종 재위 24년(1493년)에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     직했다. 절간에서는 ‘애(哀), 애(哀), 애(哀)’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 곡은 스토리텔링을 중점으로 김시습의 생애를 노래한 것이다. 김시습을 지칭하는 말     로는 그가 사용한 여러 가지 호(號)를 이용했고, 노래 부분의 가사는 김시습이 50세 이     후 양양의 설악에 있을 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생애를 요약한 ‘나의 삶(我生)’이라는      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지은 것이다. 그 시의 국역본을 살펴보면 이렇다.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
                     어지해서 사람 도리 못다 하였나.
                     젊어선 명리를 일삼았고
                     장년이 되어선 자빠지고 넘어졌네.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운 걸
                     진작에 깨닫지 못하였다니.  
                                         
                                          - 나의 삶 

   ‘꿈꾸다 죽은 늙은이’를 묘비로 써달라고 했던 김시습은 절간에서 들려오는 ‘애(哀), 애      (哀), 애(哀)’ 소리와 함께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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